JAE-SEONG
RYU
누구나 비슷하게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하며 월세를 내고, 다음을 준비하면서,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고 믿던 시기가 있었다. 근거를 계산해 본 적은 없다. 다들 비슷한 얼굴로 비슷한 말을 했고, 그 안에 섞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연락이 끊기고, 단체방에서 이름이 빠지고, 잠잠하던 끝에 다른 곳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나, 바빠져서 정리했다는 말만 남기고 조용히 멀어졌다. 누가 떠난다고 말한 적도 없고, 굳이 설명하지도 않았다. 각자의 사정과 형편이 겹치면서 방향이 달라졌을 뿐이다.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건, 특별히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냥 버텼기 때문이다.
가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왜 아직 이 자리에 있는지. 이유를 붙이려 하면 금세 흐려지고, 그만둘 근거를 찾으려 해도 결정적인 말은 나오지 않는다. '열심히 하면 된다'라는 말을 더는 믿지 않으면서도, 이상하게도 그 말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다. 통장에 남는 건 거의 없고, 일정은 늘 빠듯하다. 그런데도 내일은 또 해야겠다는 감각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끝내고 나면 후회가 밀려오는 날도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을 떠올리는 건 더 숨이 막힌다. 그렇게 이어온 선택들이 쌓이며, 겉에서 보기엔 마치 계획된 경력이나 꾸준한 의지처럼 보일 뿐이다.
살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는 건, 세상이 알려주는 공식과 실제가 좀처럼 맞물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열심히 준비한 일은 엉뚱한 이유로 어그러지고, 큰 기대 없이 택한 선택이 오히려 오래 버티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비슷한 실수인데도 누구에겐 그냥 지나가는 에피소드가 되고, 누구에겐 지워지지 않는 꼬리표로 남는다. 서류 하나, 메일 한 줄, 무심히 건넨 한마디,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내려진 판단 하나가 몇 년의 방향을 바꿔놓는 걸 본다. 그 안에서 미리 세워둔 기준은 자주 무력해지고, 결국 결과가 나온 뒤에야 이유를 끌어다 붙이며 원래 그럴 계획이었던 것처럼 자신을 스스로 설득하게 된다. 앞뒤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일보다, 모호하게 남는 순간이 훨씬 많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흑과 백처럼 단순하지 않다. 옳고 그름이 나뉘는 경계는 흐리고, 대부분의 시간은 그 중간 어딘가, 지워지지 않는 회색 속에서 흐른다. 세상은 가능성의 말들로 가득하지만, 그 안에서의 삶은 방향 없이 떠 있는 배에 가깝다. 이쪽도 저쪽도 선뜻 옳다고 말하기 어려운 결정들 속에서 하루를 흘려보내게 된다. 그런 자리에서 드러나는 건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다음 날에도 다시 제자리로 몸을 돌리는 습관 같은 움직임이다. 크게 바꾸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하지도 못한 채, 무너진 자리를 추슬러 다시 이어 붙이고, 밀린 일들을 조금씩 처리하며, 오늘 할 일을 오늘 몫만큼 해두는 일.
접을지, 바꿀지, 떠날지를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굴리다가도, 결국 다음 날이 오면 우리는 각자 맡은 자리로 돌아간다. 출근길, 장보기, 누군가의 연락에 답장하기, 쌓인 할 일을 하나씩 지워나가기 같은 사소한 동작들로 또 하루를 채운다. 그 미세한 반복은 누구의 구호도 달지 않았고, 특별한 신념으로 포장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삶을 계속 앞으로 밀어가는 힘은 늘 그 조용한 반복에서 나온다. 뚜렷한 이정표가 없고, 설명도 매끄럽지 않은 오늘 속에서, 그저 자리를 지키는 몸짓이야말로 내가 믿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근거처럼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