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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相反)이 상반(相伴)으로 거듭나는 순간》

전은선 (미학·미술이론 연구자)

화면에서는 두텁게 발린 물감의 맥박이 뒤엉키며 요동친다. 방금 전까지도 붓을 들고 있었을, 이 물감을 칠했을 누군가의 움직임마저 생생하게 전해진다. 메마른 붓의 결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하고 무심결에 묻은 듯한 손자국도 눈에 띈다. 한데로 쉽사리 모이지 않는 에너지가 혼란스럽게 퍼지려는 순간, 뚝떨어지는 기하학적 도형이 울타리를 쳐준다. 자유분방한 붓질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각도와 길이의 정다각형이 왠지 모를 안정감을 준다. 일정하게 구획된 면들과 이들 사이의 명도 차이로 인해 정다각형에는 깊이가 생겨난다. 이로써 정다각형은 순식간에 정다면체로 변모하여 하나의 ‘방’을 만들어낸다. 물감은 사방으로 흩어지되 이 방을 벗어나지 않은 채로, 그 안에 거하고 있는 형국으로 보인다.

 

류재성의 회화에는 언제나 두 가지 상반된 양상이 존재한다.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이 주는 대비되는 인상이 공존하고, 기다랗게 늘어지는 붓질과분무되듯 흩어지는 붓질이 병립한다. 물감은 물성이 최대한으로 드러나는 불투명한 덩이와 캔버스의 표면이 그대로 비칠 정도로 투명한 자국으로 대조되는 농도를 보여준다. <너의 왼쪽>(2023)과 <나의 오른쪽>(2023)에서처럼 기계적인 스텐실 무늬나 그래픽 디자인에서 볼 수 있을 법한 그라데이션이 손적인 붓질과 대비되어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붓질은 비정형적인 반면 캔버스의 프레임은 정형적이다. 프레임의 형태는 일반적인 직사각형에서 정삼각형, 정육각형, 정찰각형으로 다양해졌으나, 일정한 길이의 변과 규칙적인 크기의 각도가 주는 안정감은 여전히 강력하다.

 

독특한 형태의 프로엠과 다채로운 붓질의 물감을 그림을 이루는 질료 자체에 주목하도록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우리는 화면 속에서 질료가 아닌 다른 것을 보려고 애쓴다. 바로 형상이다. <오딧세이>(2023)에서는 유명한 게임 캐릭터인 ‘슈퍼 마리오’의 얼굴이 비교적 분명하게 환기되고, <터치! 캐치!>(2023)에서도 캐릭터화된 동물의 얼굴이 연상된다. 그런데 형상이 어떤 내러티브로 이어지려는 찰나, 연상은 쉬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2023)에서는 곳곳에서 사람 얼굴이 나타나지만, 이 형상은 곧 개별적인 붓질로 돌아가고 물감의 원자로 흩어진다. 물감은 손에 잡힐 듯 말 듯 방 안을 떠도는 유령같은 형상으로 떠오르다가 캔버스 표면 위에 묻은 질료 덩이가 되기를 반복한다.

 

류재성의 회화에서 질료 상태의 물감을 볼 때, 캔버스는 2차원 정다각형 평면으로 납작해진다. 반대로 물감이 아닌 어떤 형상을 볼 때는 3차원 정다면체 공간으로 깊어진다. 이 깊은 공간은 작가가 구축해놓은 환영의 공간이다. 덕분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평평한 캔버스 뿐이지만 우리는 그 안아세 하나의 ‘방’을 본다. 형상은 바로 이 환영적 공간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류재성의 화면을 바라보다 보면, 그 어떤 뚜렷한 형상도 이루지 않는 질료로서의 물감이 환영적 공간을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다. 평면과 공간이 부딪히는 오묘한 순간이다.

 

평면과 공간을 둘러싼 문제는 작가가 그림을 그릴 때뿐만 아니라 완성된 작품을 벽면에 걸고자 할 때도 제기된다. 벽면은 캔버스와 같은 또 하나의 평면이고, 작품은 그 위에 구축되는 일종의 공간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류재성은 자신의 여러 작품을 벽면에 배치한다. 종종 이 배치는 벽면에서 바닥으로 연장되어 ‘설치’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한 예료 2020년작 <원적문제 Squaring the Circle>에서는 평면 위에 그려진 환영적인 직육면체가 실제 시공간에 놓인 직육면체 입체물의 한 면에 귀속된다. 캔버스 안에 머물고 싶은 바람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설치라는 박식을 활용하게 된 것은 바로 평면과 공간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려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이렇듯 류재성의 회화는 상반되는 대립쌍을 한데 품고 있다. 대립쌍을 이루는 요소들은 어떠한 스펙트럼의 양극에 각각 위치한다. 서로 배척하는 이

요소들을 양극에 고정시켜 놓으면 아주 유용한 이분법적 틀이 완성된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고 있는 MBTI 성격 유형 검사도 이 틀을 십분 활용한다. 검사를 통해 네 가지 영역에서 상반되는 성향 중 우세한 쪽이 결정되면 조합에 따라 특정한 성격 유형에 속하게 된다. 검사의 선택지는 해당 질문에 대한 전적인 동의 및 미동의를 기준으로 여러 중립적 단계들을 포함한다.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답을 해야 하며, 가능하면 중립을 택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실상 자아는 양극의 성향을 오가며 존립한다. 검사 도중에 답을 망설이는 때가 여러 번 있지만, 검사를 마친 후 네 개의 알파벳으로 성격이 규정되면 고민의 시간들은 자취없이 휘발해버린다. 한쪽의 성향으로 굳어졌더라도 얼마든지 반대쪽의 성향을 발휘할 수 있고, 정반대의 성향을 반반씩 지닌 사람도 있다. 류재성은 일찍이 본인 안에서 이러한 양극적 자아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나아가, 그는 자아와 마찬가지로 회화 역시 상반된 조건들 위에 존립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는 바탕이 되는 ‘캔버스’는 고정되어 있고 정형적인 반면, 그 위에 그려지는 ‘물감’은 유동적이고 비정형적이다. 상반되는 두 ‘질료’가 만나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실재하는 2차원 ‘평면’ 위에 환영적인 3차원 ‘공간’이 구축된다.

 

이분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중간 지대에 대한 탐구가 동시대적 과제로 주어지는 시기이다. 많은 작가들이 이분된 것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몰두하는 와중에 류재성은 역설적이게도 극단적인 이분법을 택한다. 그의 화면은 상반된 것들이 각자의 개성을 극한으로 밀어붙일 때 오히려 상호적 관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에는 위험이 뒤따른다. 상반된 것들이 서로의 수렁에 빠져 무화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가는 작업 중에 양극의 요소들이 충동하는 경우를 계속해서 맞이한다. 역전을 거듭하는 둘 사이를 조율하면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양극적 성향을 오간다. 오직 감각에 의존하여 즉흥적으로 그리기도 하고,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여 의도를 실행하기도 한다.

 

작가가 균형을 찾았다고 해서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 균형은 명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감장자 역시 상반된 것들 사이를 직집 오가야 한다. 작가가 양극적 자아를 자각할 때 혼란을 느끼듯이, 그의 화면을 마주할 때 느껴지는 혼란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어떻게든 정착할 곳을 찾으려는 인간의 습성 때문에 이 혼란은 불안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우리는 어지럽지만 자유로운 평면과 냉담하지만 안정적인 공간 사이에서균형을 찾게 된다. 이 지점에서 대립쌍은 스스로 존속하면서도 서로를 구축하는 이상적인 관계가 된다. 상반된 것들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의 직선을 만들고 있다는 걸 깨닫는 이 순간, 류재성의 화면은 제 의미를 획독하게 된다. 서로 반대되는 상반(相反)이 서로 짝을 이뤄 함께 하는 상반(相伴)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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